세상은 불합리하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한순간에 앗아가기도 하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며, 소중한 순간 또한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면 이것쯤은 이겨내라는 것인지. 한없이 소중하게 만들어놓고, 자꾸만 위기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것들을 모두 이겨냈기에 지금의 본인이 있다는 걸,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당시엔 괴로웠을지라도 그 경험을 통해 성장한 건 분명하니까.
그런 불합리함을 겪은 이가 자신뿐만이 아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걸 아는 천재. 컴퓨터와 같은 두뇌를 가진 노이만이라 해도, 이렇게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첫 인상은 최악. 정반대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허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던가, 막상 알아가보니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한 도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사랑하는 이를 자의로 떠나보낸 경험, 호전적인 성향. 왜 그 일본 지부장이 굳이 합을 맞추게 했는지 그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비슷함을 인정하기 싫었을뿐.
그러니 교토와 도쿄라는 거리 속에서도 굳이 시간을 내어 임무에 응했을 터이다. 기본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성향이긴 하나, '테미스'라는 코드네임에 부여된 권한은 임무 하나를 거절한다 하여 바래질 것이 아니었으므로. 누군가와 페어가 되어 임무를 다니는 것쯤은 충분히 거절할 수 있고, 리바이어선 또한 구태여 강권하지 않을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쉬이 응한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자 사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필요성이었을 수도, 단순한 오지랖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그녀를 더러 누군가는 독하다 하고, 또 다른 이는 무섭다 했으나... 시오리에게 그런 평들은 문제가 아니었다. 거슬릴지언정 상처가 되지는 않았고, 어린 나이부터 지부장이라는 자리에 올라 독하고 무섭게 행동한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 탓에 제가 가진 책임감과 사명감은 남들에 비해 두텁고 무거웠다. 거두어 들인 아이들이. 그 아이들의 미래가 지금도 양 어깨에 자리 잡고 있으니 제 사견을 더해 임무를 거절할 이유 따위 존재치 않았다. 오버드, 그것도 UGN에 소속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란 세상을 보다 안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들이니까.
해서, 페어이자 감시역을 자처했다. 누군가는 알량한 사명감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위선적 도덕성이라 부를 이름의 감정. 허나 그녀에게 후회는 없었다. 작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오버드들로 이루어진 특수부대, 템페스트. 그녀의 파트너는 그곳의 일원이었다. UGN 내부 기록 상으로는 탈퇴 처리로 적혀 있으나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게 문제일뿐이다. 그리고 시오리는... 그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전부.
보고하지 않은 이유, 추궁하지 않은 이유, 보고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응당 밝혀져야 할 때가 아니라면 오히려 비효율적이니까. 물론 그새 미운정이 들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그녀는 늘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제게 손을 내민 이를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여 보호자를 자처하는 것부터 그랬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되어주었고, 어른들에게는 쉬어갈 언덕이 되어주었다. 그 타고난 성정이 제 파트너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 것뿐이다.
함께 넘은 산이 많았고, 서로를 건져낸 삶의 고비가 많았다. 그 기간 동안 상대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 인지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점차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안에 과거사가 포함되었다. 모든 걸 알면서, 언제든 배신—더블크로스—할 수 있는 이를 지켜보는 게 그녀가 신뢰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 점은 그 또한 알고 있었을 테다. 동물의 감은 예리하고 잘 벼려져있어, 아주 작은 신호라도 알아챌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을 너무 많이 믿는 게 아닌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일어나지도 않게 할 거고요."
확신이 담긴 분홍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면, 금빛 눈동자 또한 가볍게 휘어졌다. 어른들의 신뢰란 의외로 간단해서 한번 묶어놓으면 쉬이 풀리지 않는다. 비유해보자면 서로가 서로의 목줄인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 관계에서 목줄을 쥔 쪽이 누구인지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어머, 저를 믿는 거예요? 제가 갑자기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배신 같은 거, 할 생각도 없지 않나?"
"흠... 너무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아요. 잘 아시네요."
"그런 건 됐고.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지."
"찬성이에요. 가벼운... 건 안되겠지만..."
"안된다네."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로 지레 겁먹지 않고 의연하게 나아가는 것. 이미 일어난 일에 매몰되지 않고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는 것. 지금 겪고 있는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것. 신뢰하는 이에게 믿음을 증명하는 것.
머리가 굳을만큼 굳은 어른이 되어서야 배울 수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소중한 경험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두 사람에겐 그랬다. 의도치 않게 일상에서도, 비일상에서도 자주 보게 되었으니까. 잔소리를 퍼붓고, 등을 맡기고, 시시콜콜한 일들과 온갖 사건들을 함께 겪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까워졌다.
뭐,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